파시즘, 정의와 배경 정리

 현재 파시즘은 위와 같이 사전에 정의되어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학자들 사이에서 파시즘을 정의 내린다는 것은 이 같은 예시처럼 터무니없고 난해한 일로 여겨져 왔습니다. 파시즘은 역사적으로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내세운 체제와 이념만을 의미해왔습니다. 하지만 이는 곧 세계대전과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등 세계 각지에서 출몰한 전체주의적 체제와 이념을 통칭하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이 파시즘을 굳이 나열해서 설명하자면, 급진적이고, 전체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이고, 국수주의적인 사상 및 이념 정도로 말할 수 있습니다. 굉장히 혼잡스럽고 장황한 설명인데, 파시즘을 정의하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같은 파시즘으로 묶이지만 이탈리아 무솔리니의 파시즘과 독일 히틀러의 파시즘, 일본 천황제 파시즘들 사이에도 서로 명백한 차이를 보이는데,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발생한 파시즘은 서로 얼마나 큰 차이를 보일까요? 이 때문에 파시즘을 연구하던 수많은 학자들도 이를 독자적인 하나의 사상으로 보기보다는 산발적인 이데올로기들의 합체 정도로 여겨왔습니다.

 그러나 90년대에 이르러 Roger Griffin이라는 학자를 시작으로 '파시즘도 일반적인 개념으로 이론화시킬 수 있다.'라는 주장이 제기되기 시작했습니다. 학자들은 이를 '새로운 합의'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 이론의 등장으로 파시즘은 학자들 사이의 논쟁거리로 대두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까지가 파시즘을 사이에 둔 학자들 간의 논의 내용입니다.

파시즘 정의, 파시즘 배경

 
파시즘의 시작,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와 파시스트
파시즘 정의, 파시즘 배경

 이 파시즘을 조금 더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 파시즘이 태동한 1차 대전 시기의 이탈리아 사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1차 대전 당시 연합국의 편에서 싸웠던 이탈리아는 다른 승전국이던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제대로 된 전후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모욕적인 뒤통수를 맞은 셈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차별을 받은 이탈리아 내부에서는 민족주의, 애국주의적 의식이 폭발적으로 치솟아 오르기 시작합니다. 이 상황에서 공산주의 세력이 일으킨 러시아 혁명은 소련이라는 공산국가의 등장과 함께 이탈리아를 포함한 전 유럽 사회에 자본주의의 위기라는 서늘한 공포를 안겨다 주었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 이탈리아에서는 이에 대한 분노와 공포의 에너지가 급격히 뿜어져 나오기 시작하였고, 결국, 1919년 3월 무솔리니를 필두로 한 민족주의 정당 Fasci di Combattimento(전투 파쇼)가 등장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이 파쇼당의 창시자 무솔리니는 아이러니하게도 1차 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강직하고 소신 있는 사회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사회주의 신문사의 편집장으로 일하면서 정부를 비판하는 다양한 글들을 기고해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부터 조금씩 사회주의 세력과의 마찰을 보이기 시작하였는데, 세계대전 참전에 대해 적극적인 지지를 보였던 그와 달리 그가 속한 사회당은 이탈리아의 참전을 반대하며 중립을 지키기를 희망했습니다. 이러한 의견 차이로 인해 무솔리니는 사회당과 결별하고 세계대전 참전을 원하는 내셔널리스트, 자유주의자들과 함께 참전 운동을 벌이게 됩니다. 그리고 전장으로 달려 나갔던 무솔리니는 세계대전의 종전 이후 확고한 반사회주의자이자 운명론자로 탈바꿈하여 애국과 민족을 앞세운 정당 Fasci di Combattimento(전투 파쇼)를 창설하기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한편, 같은 시기 사회주의 세력들은 전후 극심한 경기 침체와 정치적 불안을 틈타 노동자들과 함께 여러 공장들을 습격하여 점령해나가기 시작합니다. 이후 노동자들에 의한 이 같은 사회주의 혁명 시도가 계속해서 발생하자 위기감을 느낀 자본가와 기업가들은 무솔리니의 파쇼당을 중심으로 뭉쳐나가기 시작합니다. 이후 파시즘은 자본가와 기업가들을 등에 업고 점점 더 거대한 세력을 형성해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파쇼당은 이들의 열렬한 지지에 부응하기 위해 자신들의 준군사 조직인 '국가 안보 의용 민병대' 일명 '검은 셔츠단'을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자신들 파시스트와 대립하던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아나키스트, 심지어 민주적 노동조합까지 무차별적으로 두들겨 패고 작살을 내기 시작합니다. 이런 폭력적 탄압을 통해 파시즘은 다른 세력을 눌러버리고 급격히 세력을 확장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21년 드디어 무솔리니의 파쇼당 'Fasci di Combattimento'는 '국가 파시스트당'으로서 새롭게 출범하게 됩니다.

 

 

이탈리아를 집어삼킨 무솔리니와 파시스트당

 한편 파시즘이 이렇게 성행하는 동안 이탈리아 왕국의 내각들은 사회주의 세력에 이리저리 휘둘리며 제대로 된 대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1922년, 파시스트의 위협에 위기를 느끼던 사회당은 자신들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총파업이라는 초강수를 두게 됩니다. 무솔리니는 이에 대해 정부 당국이 파업을 저지하지 못한다면 자신들 파시스트가 직접 사회당을 박살 내겠다고 선포합니다. 그는 나폴리 연설에서 "우리에게 권력을 넘기지 않는다면 우리 스스로 로마로 진군하여 정권을 쟁취할 것이다."라고 공표하였고, 격앙된 군중들은 "로마!"를 외치며 호응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1922년 10월, 무솔리니와 3만여 명의 검은 셔츠단은 역사적인 '로마 진군'을 감행하게 됩니다. 이탈리아 왕국은 이들을 제압할 무력을 충분히 보유하고 있었지만 당시 국왕이었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사회당을 대항할 파시스트당을 환영하며 오히려 무솔리니에게 내각을 구성해달라는 요청을 하게 됩니다. 로마 진군이라는 승부수를 통해 이렇게 총리의 자리까지 오르게 된 무솔리니는 파시스트는 물론, 국가주의자, 극우 자유주의자들까지 끌어들이며 빠르게 우익 내각을 구성 해나기 시작합니다. 이후 모든 실권을 장악한 무솔리니와 파시스트당은 검은 셔츠단을 통해 수많은 사회주의 정치인들을 암살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사회당을 포함한 다른 모든 당들을 해산시키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국왕과 권력 엘리트들을 등에 업은 무솔리니는 완전한 독제체제를 이룩하게 됩니다. 그는 파시즘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파시스트에게 있어, 모든 것은 국가 속에 있으며 국가를 벗어나서는 어떠한 인간적이고 정신적인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쉽게 말해 개인은 국가를 위해서만 존재하며,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당연히 희생되어야 할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는 현란한 웅변 기술과 선전으로 전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파업과 소요를 반복하던 사회주의자들을 때려잡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이러한 억압 속에서도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는 공공사업과 사회개혁들로 인해 이탈리아 국민들은 파시즘에 열광하며 광신도처럼 비정상적인 사상에 물들어가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조국의 번영과 영광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파시스트당에 복종할 자세가 되어 있던 것입니다. 유럽과 미국의 언론들은 무솔리니에 대해 천재나 초인 같은 표현들을 사용하며 극찬하기 시작했고, 무솔리니는 이탈리아를 구할 영웅으로 떠받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무솔리니를 향한 전 국민의 지지와 기대는 그에게 권력에 의한 오만을 심어주게 되었고,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는 로마 제국의 부흥을 부르짖으며 적극적 팽창주의 노선을 채택하기 시작하였고, 1935년에 이르러 결국 에티오피아를 대대적으로 침공하여 병합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1920년대부터 이탈리아 파시즘과 창궐과 발전, 그리고 번영을 남몰래 지켜보던 이들이 독일과 일본이었습니다.

 

 

관련 포스팅

파시즘의 확산, 무솔리니와 히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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