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의 확산, 무솔리니와 히틀러

 파시즘, 개인적으로 글자만 봐도 무언가 강력해보고 굉장히 권위적인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이런 파시즘도 등장부터 굉장히 모호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반공주의, 반자본주의 등 당시 주류 이념들을 반대하며 멋지게 등장했지만, 정작 파시즘 스스로는 무언가 다른 명확한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무솔리니의 집권 당시에도 파시스트당의 정책들은 이랬다 저랬다를 반복하였는데, 이들은 사회주의자들을 탄압하면서도 정작 본인들은 노동자단체를 설립하면서 사회주의적 정책을 펼치는 등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호성에도 불구하고 파시즘은 당시 대중들의 수많은 지지에 힘입어 20세기의 가장 강력한 정치 운동 중 하나로 부상했고, 실제로 파시즘을 채택한 몇몇 국가들은 가시적인 발전을 이루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의 중심에서 가장 강력한 단결과 호응을 이끌었던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당은 당시 수많은 추종자들을 만들어냈습니다. 그 수많은 추종자 중 하나는 바로 독일 나치의 히틀러였습니다. 

파시즘, 무솔리니, 히틀러
 
파시즘의 확산, 무솔리니에서 히틀러로
파시즘, 무솔리니, 히틀러

 무솔리니가 파시스트당을 창설했던 1919년 당시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 노동자당'의 일개 당원일 뿐이었습니다. 그 또한 무솔리니와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사회주의 혁명을 부르짖는 반정부 성향을 띄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도 특유의 카리스마와 달변 능력을 뽐냈던 히틀러는 타고난 특유의 말솜씨를 보유해 당에서 가장 뛰어난 대중 연설가라는 타이틀을 거머쥐며 빠르게 인지도를 쌓아가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그가 속한 독일 노동자당은 1920년대에 당의 명칭을 새롭게 바꾸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 줄여서 '나치당'입니다. 이 나치당에서 열심히 연설하며 인지도를 쌓아올린 히틀러는 1921년에 이르러서는 이 달변 능력 하나로 일개 당원에서 당의 지도자의 자리까지 우뚝 올라서게 됩니다. 그로부터 1년 뒤 이탈리아에서는 무솔리니에 의한 '로마 진군'이 감행되어 파시스트당이 정권을 쟁취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됩니다. 이 소식은 유럽과 북미 전역에 빠르게 전파되었고, 무솔리니의 행보에 크게 감명을 받은 히틀러는 자신도 무솔리니와 같은 대단한 혁명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1년 뒤 1923년, 히틀러는 약 3000명에 달하는 나치당원을 이끌고 로마 진군을 베낀 '베를린 진군(뮌헨 폭동)'을 감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굉장히 무모하면서도 호기롭게 시작된 이 행진은 그의 예상과는 다소 다른 결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파시즘, 무솔리니, 히틀러
파시즘, 무솔리니, 히틀러

 이들은 베를린은 커녕 근처 공원을 벗어나기도 전에 대기하고 있던 무장 경찰대의 무자비한 일제사격으로 순식간에 박살나고 말았습니다. 갑작스런 날벼락에 나치당원들은 뿔뿔히 흩어지기 시작했고, 이 사태 속에서 히틀러는 왼 팔이 부러지고, 체포당해 실형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감옥에서 8개월을 지낸 히틀러는 다시 사회로 복귀하게 됩니다. 그동안 많은 생각에 잠겼던 히틀러는 혁명으로는 정권을 쟁취하기 힘들 것이라 판단했고, 정당한 선거를 통해서만 집권이 가능하리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히틀러는 와해된 나치 세력들을 다시금 끌어모아 선거운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노동자와 공산당을 고립시키는 전략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게 농민들과 보수파들에게 크게 먹히면서 나치당은 다시 한 번 도약을 이루어내게 됩니다. 히틀러는 나치당의 활동에서 이탈리아 파시즘의 여러 특징들을 베껴다 쓰기 시작하였는데 대표적으로 나치당의 돌격대는 파쇼당의 검은 셔츠당을 모방한 조직이었고, 나치식 경례로 유명한 경례법도 사실은 히틀러가 파쇼당의 경례를 본 후 따라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나치즘 vs 파시즘

파시즘, 무솔리니, 히틀러
파시즘, 무솔리니, 히틀러

 그러나 나치즘이 아무리 파시즘의 영향을 받은 사상이라 할지라도 1930년대 중반까지는 명확히 구분되는 몇가지 특징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인종주의와 반유대주의의 활용이었습니다. 히틀러가 아리아 인종에 대한 우월성을 강조하며 유대인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해왔던 것과는 달리, 이탈리아의 파시즘은 3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이러한 인종차별적 행보는 상대적으로 미약했습니다. 물론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국가의 주요 사상으로서 대놓고 인종주의를 내세우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처럼 히틀러가 조금씩 스스로의 세력을 규합시키고 있던 과정에서 1929년 미국발 세계 대공황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독일의 경제 상황은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데, 이러한 독일의 내부적 위기는 히틀러와 나치당에는 큰 기회였습니다. 국민들은 극단적 사상에 열광하며 독일의 부흥을 부르짖었고, 이와 같은 상황에서 파시즘은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33년 히틀러는 마침내 총리의 자리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하게 됩니다. 이러한 히틀러와 나치당의 소식은 무솔리니의 귀에까지 들려오기 시작하였는데, 처음에는 그들을 단지 위험한 경쟁자로 여기고 있던 그도 점차 이들과의 협력이 이탈리아 세력 확장에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하면서 나치에 대해 조금씩 호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935년, 이탈리아의 군대가 에티오피아를 침공하였을 때 오직 독일만이 이탈리아를 지지해주었는데, 그로부터 1년 뒤 이들은 결국 추축 동맹을 맺게 됩니다. 이후 이탈리아도 동맹국 독일과 마찬가지로 인종주의와 반유대주의 정책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일본은 어떻게 파시즘을 만났을까? - 1

파시즘, 무솔리니, 히틀러

 그렇다면 일본은 어떻게 파시즘을 만나게 된 것일까요? 우선 당시 일본 제국이 파쇼국가였느냐, 아니냐에 대한 갑론을박은 일단 뒤로하고 간단히 정리해보자면, 당시 일본은 어느 정도 파시즘의 영향을 받았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1920년대의 일본은 민주주의에 성큼 다가갔던 사회였습니다. 성인 남성이라면 누구나 투표를 할 수 있었고, 다수당이 내각을 이끌어가는 의회주의 체제는 생각보다 잘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의회 안에 일본의 파시스트라고 불리는 '기타 잇키'라는 한 의원이 있었는데, 그는 유럽의 파시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일본 또한 파시즘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해오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던 1929년, 미국과 유럽 사회를 덮친 세계 대공황이 일본의 경제에도 심각한 위기를 안겨다 주게 됩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청년 장교들이 1936년 2월 26일, 천황 아래 새로운 독재 정권의 수립을 목표로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들의 상당수는 기타 잇키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던 인물들입니다. 반란을 통해 일본을 파시즘 국가로 재탄생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반란은 결국 일본 군부에 의해 빠르게 진압되고 말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기타 잇키 또한 반란군의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는 이유로 체포된 뒤 사형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은 어떻게 파시즘을 만났을까? - 2

 그럼 이렇게 파시스트를 진압했던 일본이 어떻게 파시즘의 영향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이후 일본 내각과 천황의 흥미로운 행보 때문이었습니다. 이전부터 의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일본 군부들은 이번 반란군 진압 사태를 통해 막대한 영향력을 확보하여 내각을 좌우하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 내각의 총리였던 '고노에 후미마루'는 '쇼와 연구회'라는 정책연구기관을 설립하여 이곳에서 제시하는 조언들을 정부의 정책에 반영하기 시작하였는데, 중요한 것은 이 '쇼와 연구회'가 파시즘적 정책들을 연구해온 단체라는 것입니다. 일본 정부는 이 기관에서 제시되는 정책들을 취사선택하여 적절히 활용해왔었는데, 이것이 바로 일본 제국이 파시즘의 영향을 받았었다는 가장 큰 근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잇 일본에는 파시즘 형성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소가 배제되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지도자들과 경쟁을 벌이는 공식 파시스트 정당이 없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파시즘을 향한 자발적인 대중 운동이 전무했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요소가 빠져있던 당시 일본에 대해 파시즘 국가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당시 일본은 파시즘 국가로 보기보다는 파시즘 성향을 띤 군부독재 국가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군국주의 국가로 탈바꿈한 일본은 독일, 이탈리아와 함께 삼국 동맹조약을 맺으며 추축국 라인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들은 세계지배라는 엄청난 꿈을 지닌 채 연합국과의 한판승부를 벌이지만 처참하게 패배하게 됩니다.

 

 

파시즘의 조건? 파시즘의 모호한 정의

파시즘, 무솔리니, 히틀러

 결국 1945년을 기점으로 장렬하게 산화한 파시즘은 이후 세계 각지에서 비슷한 형태를 통해 몇 번씩 고개를 내밀곤 했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것들을 전부 파시즘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아니라면 그중 무엇이 파시즘이고 무엇이 아닌지 논란 속에 휩싸여있습니다. 과연 스탈린 치하의 소련은 파시즘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일본의 극우세력은 파시스트인 것일까요? 일베와 워마드는 파시즘적 성향을 띠고 있는 것일까요? 북한은 파시즘 국가인가요? 우리는 이처럼 종종 특정한 세력들을 향해 파시즘이라고 지칭하지만, 학자들은 오히려 이런 파시즘이라는 단어의 지나친 남용이 파시즘을 더욱 정의내리기 어렵게 만든다고 지칭합니다. 그렇다면 애초에 파시즘은 왜 이렇게 정의하기가 어려운 것일까요?

 우선 파시즘이 되기 위한 조건들을 나열해보겠습니다. 극단적 내셔널리즘,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 독재, 인종주의, 반유대주의, 유일 정당, 준군사조직, 전체주의, 반자본주의, 반사회주의, 반공산주의, 반자유주의, 반의회주의, 반입헌주의, 폭력의 사용. 이 같은 요소들은 명백한 파시즘의 특징들입니다. 그런데 이 특징들을 모두 만족해야만 파시즘이라고 할 수 있다면 이 중에서 몇 가지만을 충족하는 사상은 파시즘이 아닌 것일까요? 파시즘을 내세우며 동시에 사회주의적인 정책들도 함께 펼쳤던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당은 파시즘이 아니었던 것일까요? 파시즘은 이처럼 개념적 정의가 매우 까다롭다는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또한 더 나아가 파시즘은 하나의 사상으로서도 커다란 결함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바로 학자들마다의 주장이 전부 제각각이라는 것입니다. 즉, 이는 파시즘의 정의는 학자들마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파시즘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개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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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 정의와 배경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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